열매 맺지 못하는 시간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
 이선주       
 KBS - San Francisco      
 
 

이선주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1-3).

웹진 이번 호 주제 Meditation (묵상) 의 주제구절이 시편 1:1-3이라는 소개를 읽는데 속이 아려왔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고는 했지만 즐거워하지도 못했고 열매를 맺지도 못했으며 잎사귀는 커녕 나무껍질까지 벗겨진 듯 헐벗었던 시간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혹 비슷한 기억을 떠올리시는 분들과 공감과 격려를 나누고픈 마음에 그 시간을 정리해 보려한다.

나는 89년도 미국에 온 후 그 때까지 좇아온 나의 기준, 사회의 기준의 무의미함을 사무치게 경험했지만 대안을 찾지 못하고 무기력과 무관심 일색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95년 초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 받았고, 그 사랑으로 인해 사랑하며 살 희망을 갖게 되었다.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의 직접적인 전달자였고 나의 삶의 변화의 원동력이었으며 내가 나누어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었다. 자연히 말씀 묵상은 그 후 나의 매일의 축이며 등대며 잔치가 되었다.

그러나 2000년 정도부터 인지 말씀이 생명으로, 영감으로, 빛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책에 쓰여있는 선한 글, 내가 이해하고 정리해서 전해야 하는 숙제일 뿐이었다. 감동이 없진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선명케 되는 문제 의식과 그에 따른 결심들도 잦아졌지만, 그 어두운 터널에서 희미한 빛으로 발걸음이 옮겨졌다는 확신이 들기까지 약 8년이 걸린 것 같다. 지나온 굴곡을 돌아보며, 왜 그런 시간이 나에게 찾아 올 수 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먼저, 그 때까지의 묵상을 통한 열매들이 교만의 씨가 되었다. 내가 말씀의 원리를 파악한 것 같았고, 그 원리를 벗어나 있거나 미치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정답을 주고 싶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시인의 고백과는 달리 (시 131:1), 스스로 제한해 놓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오히려 저의 한계를 벗어나는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 안달을 부렸다.

또한, 묵상이 율법이 되어 버렸다. 간사에게 요청되는 하루 두 시간 묵상의 지침이 하나님과 이웃을 알아가는 기쁨의 수단이 아니라 미달되어서는 안 되는 속박의 틀이 되었다. 정해진 시간을 채우지 못하면 조급함과 짜증이 일었고, 정해진 시간을 채워도 그 시간 내가 무엇을 했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엉덩이를 붙이고 성경책을 펴놓고 있어도, 한 단어 한 문장 적혀있는 이외에 무엇을 더 짜내야 하는지 깜깜했다. 예를 들어 "주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을 읽으면, "그래, 주님은 사랑이시지. 근데 이걸 어떻게 더 깨닫고 설명한단 말이지?" 하는 생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채워갔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 어쩌면 당연하게도 –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묵상의 근원과 주체를 분명히 해 주시고, 그로부터 내가 얼마나 멀어져 가고 있었음을 지적해 주셨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것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갈 2:20-21)" 어느 날 이 말씀을 읽는 가운데, 자아의 지식과 성취욕과 강박관념에서 비롯되는 '묵상'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든다는 사실에, 새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 충격 이후에도 정상 궤도에 들어가기 까지는 한참이 걸렸고, 그 기간을 다음 몇 가지 몸부림으로 간신히 채워갈 수 있었다.


빳데루
어떤 분이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을 "빳데루"와 비교하셨다. 레슬링 시합에서 반칙을 한 선수가 바닥에 엎드려서 종이 칠 때까지 견디면 다음 회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빳데루의 관건은, 화려한 공격도 적절한 방어도 아니고 그저 납작 엎드려 버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교만과 율법의 반칙으로 인해 어떤 방식의 묵상도 통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든 하나님께 붙어 있었던 것이, 다음 장을 열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붙어 있는 것인가" 하고 질문한다면, 내가 의식할 수 있는 한 나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기도
빳데루의 한 표현으로, 전과는 다른 형태의 기도가 잦아 졌다. 전에는 깨어있는 의식으로 사람과 상황을 말씀에 비추며 부탁 드리는 의지적인 기도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성과 지각을 통한 말씀과의 교감이 막히자, 비슷한 수단을 사용한 기도도 어려워 졌고, 따라서 말이나 의식 상에서 표현되지 않지만 혼미하고 어지러운 마음 자체를 하나님께 드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기도라고 명명하기도 민망한 그런 시간을 보내며 구체적인 중보 기도가 부족하다는 자책감도 들었지만, 당시로서는 바닥에 뻗어서 하나님께 붙어 있게 해 준 땀방울이었다.


돌아보기
그 전까지 설정한 하나님과의 관계의 공식이 들어맞지 않게 되자, 저 자신을 좀 더 총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비추어 보게 되었다. 우연치 않은 여러 기회들을 통해 나의 과거, 성향, 동기들을 돌아보며, 나의 인생에 더 깊이 간섭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을 막고 있는 매듭들을 보게 되었다.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자, 다른 사람들을 향한 관심과 이해도 넓어 지고, 각 사람을 섬세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초월하심을 인정하면서, 나 자신의 잣대에서 조금씩 자유로워 지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이제는 묵상의 운행이 정지된 듯한 터널을 지난 것이 아닌가 가늠하며 미래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어두운 기간의 많은 부분이 현재의 길과 여전히 얽혀서 구체적으로 어디로 이어질지 확실치 않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터널의 이전보다 지금 더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제가 상상했던 것 보다, 바랄 수 있던 것보다 더 큰 축복의 열매였음을 분명히 고백할 수 있다. 오늘도 희미하게 떠오르는 말씀으로 내 마음과 소통하시고 온 세계를 붙들고 계시다니 그 기이함이 놀라와 다시 말씀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터널의 안도 바깥도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 있기에, 내 인생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사랑을 드린다.

주님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밤도 대낮처럼 밝으니, 주님 앞에서는 어둠과 빛이 다 같습니다. (시 139:12)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 6:68)

<도움서적>
St. John of the Cross, Dark Night of the Soul (한국어판: 영혼의 어두운 밤).
Th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센터링 침묵기도).
Dan Allender, To be Told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

 

편집: 김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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