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정체 상태에 부닥쳤을때의 마음 가짐
 윤형선       
 서울 sKBS - 연세대학교      
 
 

윤형선유학 가기 전 내가 어설프게 경험했던 기독교는 신앙과 삶이 서로 별개인 곳이었다. 신앙심이 좋다고 해서 인격이나 삶의 모습이 훌륭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점에 대해서 기독교인들간에도 어느정도 이해되는 분위기라고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런 모습들을 신앙인의 위선이라고 여겼고, 신앙은 현실을 위로 받기 위한 착각의 도구라고 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신앙인의 위선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모순점들을 핑계로 하나님과 가까워 지지 못하던 나는 유학가자마자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났던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과 나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다시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게 되어, 일부 기독교인들의 모순들이 내가 신앙 생활 하는데 더 이상의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 그분에 대해서 더 알기 위해 시작했던 캠퍼스 성경공부는 나에게 신앙과 삶은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고, 삶을 통한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가르쳐주었으며, 훈련의 장이 되어주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그러나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있는 현재, 나는 나의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만 가는, 즉, 오래 전에 내가 참을 수 없었던 위선적인 신앙인들의 모습들을 내 스스로에게서 발견하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미국과 한국이라는 공간적인 이유일까? 아니면 학생과 직장인이라는 달라진 상황때문일까? 고민하던중, 피아노를 전공하던 친구가 자주 들려주던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의 말을 통해 답을 찾았다.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오케스트라가 안다. 그리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세상이 안다."

나의 삶을 돌아보니, "이미 세상도 포기하는 수준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 애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4:6-7)

그렇다면 왜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 위한 연습을 다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경건의 연습을 방해해 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크게 두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게으름 때문이었다.

또한, 이런 근본적인 대답 외에 좀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들도 고민해보았다. 당장 변화되고 싶은 우리의 욕구, 빠르게 변화되는 것 같지만 금새 무너지는 모습들, 어느 정도의 신앙 생활에 만족하려는 타성적 모습들이 우리 저변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신앙의 성과주의와 강박증, 그리고 현실주의가 경건 연습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중적인 상업문화와 성공신화가 주는 메시지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장기간의 연단의 과정과 인내보다는 끝없는 성취와 즉각적인 해결책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다. 그래서인지 믿음의 선배들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그들의 간증 역시 그들이 겪은 힘든 연단의 과정과 인내의 시간보다는 즉각적인 믿음의 결과와 변화만을 동경하게 만든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믿음의 길에서 부닥치는 힘든 고난의 과정 (신앙 생활의 정체)은 기대치 못한채 신앙의 정체 상태에 부딪혔을때 당황하거나 안주하거나 아니면 포기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윤형선성경공부를 섬기게 된 첫 학기에는 성령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로 시작했건만, 이후 정체 상태와 낙담은 반복해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매 학기 똑같은 상황이 찾아왔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수백 번 도 더 했다. 그러나 이를 통과할 때마다 뭔가 미미한 변화가 있음을 보았다. 마치 영어실력이 안 늘어 고민하면서 한 학기를 마칠 때마다 조금씩 향상되었다는 것을 느꼈던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우리는 경건의 연습에서 정체상태와 슬럼프를 신앙 생활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 하루 아침에 믿음의 선배들처럼 예수님처럼 변화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들을 참고 견딤으로 주님께 조금 더 나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정체상태가 찾아올 때마다 "또 다른 정체가 찾아왔군, 또 다른 슬럼프군, 꾸준히 하다 보면 얼마 후 나아지겠지"라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경건의 연습은 신앙의 결과와 만족을 가져주는 것이 아닌, 그 과정 자체를 사랑하는 것, 즉, 믿음의 길에서 그리스도를 푯대 삼아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 과정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신앙이나 삶이나 결국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 분을 닮기 위해 사는 것이 경건의 연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편집: 김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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