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여행길 – 버릴때 얻고
 임현식       
 KBS - Paul Group      
 
 
임현식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갈 2:20)

이스라엘의 아동 병원. 당시 겨우 열두 살 소녀였던 사마흐 가드반은 벌써 5년 동안이나 심장 이식 수술을 기다려왔다. 하지만, 전통적 종교 관습으로 인해 장기 기증이 드문 유대인 사회에서 기증자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힘 없는 촛불처럼 스러져가는 어린 생명을 바라만 보던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했다. 모든 기대가 사라져갈 즈음, 병원 측으로부터 갑자기 익명의 장기 기증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들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뻤다.

팔레스타인 소년 아흐마드는 이제 겨우 열 두살이었다. 때는 라마단 단식 기간이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이슬람 축제 기간었다. 아흐마드는 축제 기간에 선물로 받은 장난감 총을 가지고 군인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 지역을 정찰중이던 이스라엘 군인들이 아흐마드의 장난감 총을 진짜 총으로 오인,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소년은 총상을 입고 쓰러지고 말았다. 아흐마드는 곧바로 근처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의사들은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식에 절규하던 아흐마드의 부모는 결국 두어 시간 뒤 담당 의사에게 아들의 장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기증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대상은 팔레스타인 사람이든 이스라엘 사람이든 상관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몇 시간 뒤 장기이식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사마흐를 포함해 총 세 명의 이스라엘 소녀가 각각 아흐마드의 심장과 폐, 간을 이식받았고, 새 생명을 얻었다. 수술 뒤, 의사는 기뻐하는 유대인 부모들에게 이식받은 장기는 팔레스타인 소년의 것이라는 사실을 전했다. 오랜 기간 이어지고 있는 정치적, 종교적 갈등으로 철천지 원수처럼 대했던 팔레스타인 출신 소년이, 그것도 이스라엘 군인의 오인 사격에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고도 유대인 소녀를 셋이나 살렸다는 말에 유대인 부모들은 차마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아들이 축제 기간에 받은 선물이 총알 세례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축제가 끝나기 전 이스라엘 소녀들에게 더 큰 선물을 주게 돼 기쁘다.”

아흐마드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남긴 말이다. 아흐마드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된 소녀의 심장이 되어 이 땅에서의 삶이 연장되었을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보복, 증오와 저주가 난무하는 그 땅에 숭고한 용서와 사랑의 실천의 상징이 되어 새로운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슬프고도 감동적인 이 이야기는 얼마 전 한겨레 신문에서 읽은 기사를 통해 알게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외식에 빠진 유대인들을 향해 유대인 스스로도 이방인처럼 살면서 이방인들에게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를 한다고 책망을 하면서,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진정한 유대인이란 혈연 관계와 같이 세습되는,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기준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믿음의 결단으로 태어나는 것이라는 뜻이리라. 예수께서 친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아마도 소개된 이야기 속 진정한 ‘유대인’은 어린 아들을 잃은 슬픔을 증오와 복수 대신 사랑과 축복으로 승화시킨 팔레스타인 소년의 부모가 아닐까? 이런 마음과 행동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원죄의 영향으로 영적인 부분이 이미 상당 부분 상실되어 이 땅에 태어나는 우리들은 인간의 본성처럼 체화되버린 죄를 제어할 능력을 잃은지 오래다.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은 오랜 시간 죄로 물든, 힘 없는 개개인의 조촐한 결단 마저도 그대로 내버려 두질 않는다. 인간은 그저 죄의 능력 앞에 홀로 서 있는 어린 아이와 같다. 감사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범죄로 인해 길을 잃었을지언정, 의도적으로 내버려진 아이는 아니였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잃어버린 아이, 스스로 집을 뛰쳐나간 타락한 자식을 다시 찾기 위한 애타는 부모의 마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바로 자신의 죄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자신의 죄인됨을 진심으로 깨달아 슬프고 애통해 하는 마음으로 하늘의 은혜를 구할 때, 내 안에 참 주인께서 거하실 자리가 생긴다. 오랜 기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비뚤어진 죄성은 그래도 한동안 그 영향력을 행사하려 든다. 때때로 죄성의 교활한 협박과 나태함에 무릎 꿇고 좌절감에 빠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내 안에 사시는 그 분은 여전히 당신의 자리를 나의 자유 의지에 맡겨두실 뿐 당신 자리 내어주기 싫다고 고집하시는 법이 없다. 결단의 순간, 이미 영적 세계의 ‘등기’는 완료되어 집 주인 ‘명의 변경’까지 모두 마쳤다고는 하나, 원래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육신의 겉옷을 입고 살아가는 한 평생은 아마도 크고 작은 시행착오가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다. 길어야 한 세기. 잠시 주어진 인생의 여행길은 영원한 집에 돌아가 살기위한 연습이고 훈련이다.

 

편집: 구일모, 김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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