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최원석       
 KBS - American University      
 
 

최원석
<기억 1>

1996년 어느 날, 방송에서 밍크 모피코트의 제조과정을 보게 되었다. 모피로 만들어지기 위해 포획된 수 십 마리의 동물들이 제 몸 하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작은 우리에 갇혀 버둥거리는 장면이었는데, 한때 야생을 활보하던 동물들은 결국 그 열악하고 답답한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채 정신을 놓고서는 서로를 물고 뜯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 날, TV를 통해 내가 본 것은 학대받는 동물들이었고 동시에 ‘상황의 희생자’들이었다.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기구한 상황에 영혼과 육체를 희생당하는 생명들. 그리고 문득 지금 내가 그 ‘상황의 희생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과 슬픔 때문에 눈물을 참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의욕적으로 다시 시작하셨던 사업을 정리해야만 했던 아버지는 명민하고 멋스럽던 무늬를 잃고 설상가상 심각한 뇌혈관 질환의 발병과 생사의 투병 중에 언어 장애, 지체 장애인이 되셨고 우린 이전엔 상상치도 못했던 낯선 가난과 소외를 겪고 있었다. 다섯명의 가족은 떨어져 지내야 했고 병원비와 치료비, 상당한 액수의 채무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고 치명적이었다. 조금 조숙했을까, 여느 또래와 다르지 않았던 우리 세남매는 이제 생계를 위해 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누이들이 지친 하루 일상을 마치고 터벅 터벅 쉼 없는 집으로 돌아왔을 그 골목을 나는 아직도 아프게 기억한다.

표현을 빌자면 ‘세상이 합심하여 나를 벼랑으로 모는 것 같았고(한비야)’, 당시 자주 읊조리던 예레미야의 슬픈 노래 ‘주께서 나를 이끄시어, 빛도 없는 캄캄한 곳에서 헤매게 하시고, 온종일 손을 들어서 치고 또 치시는구나. 주께서…가난과 고생으로 나를 에우시며, 내가 도망갈 수 없도록 담을 쌓아 가두시고…살려 달라고 소리를 높여 부르짖어도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예레미야 애가 3장)’는 버림받은 우리의 얘기였다. 나는 ‘온 세계를 어깨에 맨 듯(하이네)’ 그렇게 땅으로 땅으로 꺼져가는 것만 같았다.

착한 얼굴로 ‘부자유’의 하루 하루를 보내시던 아버지, 여리고 어렸던 누이들과 순하고 고우셨던 어머니를 떠나 입대한 군대에선 마치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시온을 기억하며 울듯(시편 137편)’, 떠나온 가족과 교회를 사무치게 그리며 울었던 기억도 아련하다.


<기억 2>

은총이었다. 다행이 이런 상황가운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만남이 있었다. 시작은 당시 나를 옥죄던 ‘상황’에 정면대응 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도피하듯 열중했던 교회, 선교단체 사역이었지만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敎學相長)’했던 주일학교, 항상 모색하고 도전하며 기도했던 선교단체 사역은 후회 없이 보낸 10년이었고, 적빈(赤貧)의 청춘에 만났던 아름다운 동무들 그들이 보여주었던 호의와 따뜻한 동지애, 기도는 버팀목이자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였다.

이런 와중에 내전과 극심한 가난 최근엔 tsunami로 고통을 겪었던 스리랑카의 감리교선교센터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내 얼마의 신산한 이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고 전쟁과 죽음의 상처로 삶이 완전히 달라진 이웃들을 만났다.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노동하고 시간을 사용하며 마음 아파했고 내가 믿는 하나님께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했다. 동시대의 나라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나의 무지함, 그곳보다는 잘사는 나라의 세련된 종교인이라는 근거 없는 허위의식을 부끄러워 하며 버리려 노력했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이사야 61장)

‘눈물의 섬’이라고도 불리던 그 곳에는 영혼의 부자유, 가난과 전쟁이라는 부자유에 얽매인 이웃들의 상처를 각자의 부르심, 소명에 따라 싸매어주고 위로해주는 복음전도자들, 여러 기구의 전문가들이 있었다. 지금 이렇게 서른이 훌쩍 넘어 유학에 어울리는 학업능력도 섬세한 사고와 재능도 다 사라진 이 때, 짧은 공부지만 다시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의 관찰과 각오덕분이기도 하다.

어진 스승도 없었고 체계적인 학습도 이루어지지 않아 직관적이고 즉흥적이었지만 법학도로서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연민, 인권, 연대, 상황의 희생자 등의 개념을 붙들고 고민하고 기도하게 되었다. 누구에게 도움이 된다면 손과 발 마음을 부지런히 움직이곤 했다. 초라하고 불편해서 도망치고 싶었던 내 공간들 그 곳은 하나님이 ‘줄로 재어서 나에게 주신 …기쁨을 주는 땅이라고 참으로 나는,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다고(시편 16편)’고백하기 시작했다.


<기억 3>

신학을 전공하고 유학의 기회를 얻어DC에 정착했던 손아래 누이는 사랑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존경하는 손위 누이도 자기자리에서 이름을 얻기 시작할 즈음 난 태국에서 일하고 있었다. 2006년 8월 19일 토요일 방콕인근의 공단지역, 중요한 미팅을 순조롭게 마치고 신이 나선 휘파람을 부르며 교회로 향하던 길에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엄벙덤벙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장남 역할도 제대로 못했는데 이제 조금씩 일이 되어가는 것 같아 행복했고 안심시켜 드리고 싶었다. 서른의 철없던 아들의 너스레를‘허허, 허허’하시며 물기 있는 웃음으로 기뻐하시던 아버지의 그 웃음은 내가 이곳에서 들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그 날 오후 방콕한인교회의 선교사님께서 꼭 읽어보라며 주신 이용규 선교사님의‘내려놓음’, 신앙생활도, 서적도 소원하던 때였지만 저자의 이력과 내용에 끌려 읽던 중

우리의 건강이나 생명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고 죽음이나 질병,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기 위해 가족의 안전에 대해서도 주님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내려놓음 2부3장)

윗 대목에서부터 주체할 수 없는 안타까움, 설움 같은 감정이 섞여 울며 기도하며 밤을 새우게 되었다. 2006년 그 해는 수술 집도의께서 말했던 10년이 되던해였고 더 이상 가족 누구에게도 나쁜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강박, 근거 없는 두려움에 기인한 잘못된 근심과 염려가 많던 내 중심을 정확하게 건드리는 말씀이었다. 대면하여 다루기 꺼려져 방치해두었던 마음 깊은 곳의 공포를 마주하게 되었고 이제 이 불신을 버려버리고 싶었다.

다음 날 8월 20일 주일, 왠지 모를 차분한 마음으로 예배를 마치고는, 정말 오랜만에 또래의 청년부 지체들과 같이 차도 마시고 담소하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월요일을 맞는 21일 새벽 아버지께서 의식을 잃고 병원에 계시다는 전화를 받았고 8일 후 아버지는 오랜 세월 의지하시던‘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가셨다.


<마치며>

요사이 이렇게 바람이 좋은 날은 천국의 아버지가 몹시 그립다. 배속에 무엇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속이 메슥거리고 무언가 ‘아빠’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은데 그러질 못 할 때는 속상하고 서운하다. 하지만 사부곡이 되고 만 이 글을 기록하고 기억하며 이렇게까지 사랑해주신 하나님 은혜를 떠올리면 또 감사하게 된다. 혹 십 여 년의 작은 생채기가 상흔으로 남아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스스로 제약하고 한계 지우는 일들이 있지는 않나, 한줌뿐일 어려웠던 기억마저 아직 버리지 못한 건 아닌가 근신하기도 했다. 버리며 얻고, 완전히 죽을 때 다시 사는 이 훈련의 과정 속에, 마치 훈련을 싫어하는 군인마냥 모순되지는 않았나 하는 반성도 한다.

물방울이 바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획도 일하심도 이해하지 못하는 느리고 둔한 나를 타박하며,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라는 말씀을 연인사진 훔쳐 보듯 묵상해본다.

찬미예수!

 

편집: 김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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