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가는 것, 당신을 알아가는 것
 허수진       
 KBS -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허수진

언제인가 가졌던 KBS 모임에서 우리의 이기주의는 아주 철저히 우리의 마음과 유전자 속에 프로그래밍 되어있다는 표현을 들었었다. 그런 기본적인 죄성에, 여러 환경적 요소가 윤활유 역할을 해준 덕분일까? 남들한테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나의 관심사는 늘 구체적으로도 나 자신 이곤 했다. 취미와 특기를 자기묵상이라 말할 정도로, 나는 나 자신이라는 인물을 탐색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웃기게 들리는 말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심도 있는 자아인식에 대하여 나름의 자부심 또한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Know Thyself”라는 소크라테스 선생의 가르침을 열심히 실천하던 나를 한 순간에 멍청이로 만드시고 전라가 되도록 까발리시는 존재가 딱 한 분 계시니 그것은 바로 You-Know-Who!

자기성찰을 즐길 수 있던 이유는 어쩌면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인식이 뒷받침 되어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부터 웬만한 일은 똑 부러지게 잘 해와서, 칭찬 받는 모범생처럼 사는 것은 내게는 익숙한 일이 되어 있었다. 그런 나는 처음 KBS 성경공부에 참석했던 학부 신입생 시절, 그 모임에서 성경공부가 진행되는 방식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 모태신앙으로 자라기는 했으나 체계화가 되어있진 않던 작은 교회에서 자랐기 때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 성경 공부는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어린 나이 치고는 꽤나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자부하던 내가 얼마나 성경적 지식이 얕은지 깨닫고는, 처음으로 신앙적 조급함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내가 직접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 되기까지는 짧지 않는 시간이 걸렸으나, 머리와 가슴에 들어오기 시작한 말씀을 통하여 공동체와 섬김을 향한 열정을 발견하였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씀이 즐겁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 모임은 나의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매우 좋은 도구가 또한 되어있었다. ‘나 이런 멋진 모임 나가는 사람이야,’ ‘이 정도 성경적 지식도 있어’라는 무의식이 “신앙 좋다”라는 말을 듣기 원하는 나의 자존감을 참 많이도 세워주었던 것 같다.

근데 사람이란 스스로 인정해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며,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은 곧 나에 대해서 남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것에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마련이다. 공동체 내에서 양육과 훈련을 받고, 내가 그룹을 섬기게 된 이후에도, 내가 나를 아는 것만큼 남들이 나를 알아줬으면 하는 바램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기도제목으로 기도와 묵상을 더 열심히, 잘 할 수 있도록 이라는 이야기는 비일비재하게 보이고는 한다. 지금 와서 보면 나의 경우는, 그건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소통을 회복하고 싶어서 내놓은 기도제목이라기보다는, ‘나는 말씀을 더 잘 보고, 기도도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사람이니깐’ 이라는 내가 세운 기준에 맞는 자신이 되기 위한 바램일 경우가 많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런 나도, 말씀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영혼을 생각하는 절실한 마음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며, 매우 강하다 싶은 자기중심적 사고가 신앙인으로써 위험한 것은 아닌지 전혀 고민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 했던 사도바울의 고백을 보며, 눈물 콧물 흘리며 ‘내 안에 내가 너무 커서 도저히 예수님 계실 곳이 없다’는 묵상을 했을 리 없다. 그렇지만 분명히 절실했던 그때의 회심과 묵상이 무색해질 만큼 나의 삶은 여전히 그리스도보다는 “내”가 살고 있다. 굳이 시니컬한 각도를 가지고 보자면, 전에 했다는 묵상이 가져다 준 눈물도, 어쩌면 나를 십자가에 못박지 못해 괴로웠다기 보다는, 바울이 한 그 고백을 나는 차마 할 수 없었다는 열등감으로 인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평상시 나와 자기 성찰 토크를 즐겨 하는 한 친구와 최근에 이야기를 나누던 중 “너는 너무 오만해”라는 말을 아주 직설적으로 들었다. 믿는 친구이기는 하나 공동체를 향한 상처가 있어 폐쇄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아직은 힘들 때 그리고 기쁠 때 찾고는 하는 종교적 차원의 하나님에 안주하는 듯 해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던 친구였다. 어떻게 보면 신앙적으로는 내가 조금 내려다보던 그 친구가, 나는 자신의 신앙 생활 방식에 너무 도취되어있으며 나처럼 살지 않는 사람을 알게 모르게 배척한다는 지적을 내게 한 것이었다. 대화는 더욱 나아가, 높은 기준을 세워놓고 완벽주의자처럼 살고 싶어하는 나의 모습은, 자학으로까지 보인다는 결과에 다다랐다. 내 딴에는 그리스도를 만난 자로써, 무의식 중에도 모습을 드러내는 죄성과 싸우는 성화의 단계라 확신하고 있던 나의 노력이, 한 순간에 율법주의적 자학이라 낙인 찍힌 순간이었다. 분명히 머리로는 알고 있고, 가끔은 입으로도 ‘나는 참 바리새인 같다’ 라는 고백을 해왔지만, 이렇게 다시 한번 재확인을 당하고 나니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아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어쩐지 나의 신앙생활을 퍽퍽하고 기쁨이 넘치지 않더라.’ 늦은 시각 사람들 부쩍 거리던 식당에서 눈물범벅이 되어 괜히 웨이터들 걱정만 끼쳤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이렇듯 나의 죄인 된 참 모습을 인정하는 건 무지막지하게 자존심이 상한다. 인정만 하고 끝나면 차라리 낫지 이것을 등에 메고 거듭난 다는 것은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동반하기도 한다. 생각보다 괜찮은 줄 알았던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존재로 전락하는 것을 실감하는 그 순간, 내가 그렇게 귀히 여기던 “나”라는 존재는 칼과도 같은 바람에 갈기갈기 찢겨버린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이렇게 회오리 바람이 크게 한번 지나가주고 나면, 안개가 걷히고 그때서야 비로서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둥 나의 마음 한 가운데 미동도 않고 서 있는 한 존재가 뚜렷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입을 연다. “네가 그렇게 가슴 치도록 혐오하는 너의 모습마저도 내가 품었다 하지 않느냐. 나는, 나의 사랑은 너의 줄자로는 감히 잴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강한 자아를 처참히 뭉개버리시기도 하지만, 나의 그런 특성을 통하여 본인의 존재와 위치를 각인시켜주시는 걸 보니, 감사하게도 나의 인성을 참 존중해주시는 것도 같다. 그러나 더 이상은 속이 남아돌지 않을 정도로 나의 껍데기를 벗기고 벗기고 또 벗기실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앞이 캄캄하다. 게다가 나의 죄라는 건 어째서인지 발견을 할 때 마다 그 무게와 더러움이 커지는 듯 해 그로 인한 좌절감도 매번 자라난다.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더 넓은 품을 경험한다는 뜻일 테고, 실감하는 은혜의 크기 또한 더 커져간다는 소리일 것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도 하지 않던가? 당신을 조금 더 정확히 그리고 깊이 알고, 경험할 수만 있다면, 나를 부정하는 아픔 따위 얼마든지 감수해보겠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해본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8)

 

편집: 김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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