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칼럼
증인들
        
 이일형 (KBS  대표간사)      
 
 
이일형

“Now get up and stand on your feet. I have appeared to you to appoint you as a servant and as a witness of what you have seen of me and what I will show you.” <Acts 26:16>

2011년 2월에 보도된 어느 신문기사에 따르면 1년 광고료가 가장 높은 한국 연예인은 가수 서태지 (20억) 그리고 2위는 배우 이영애 (12억) 라고 합니다. 이 광고료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받는 연봉의 대략150배 정도 됩니다. 이런 엄청난 금액을 주며 유명인을 광고로 사용하는 데는 그 “상업적”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유명세를 이용해서 고객들로 하여금 상품에 관심을 갖게하고 또한 상품의 품질이나 이용가치를 높여 보이게 하는 심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공익광고에 나오는 연예인들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권면하고자 하는 상품은 예수입니다. 예수를 선전하는 일은 풍성한 삶, 즉 사람이 동물이 아닌 사람 되는 방법을 알리고 삶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광고효과는 연예인들의 유명세와 같이 우리 자신의 삶의 질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우리들의 삶이 풍성하지 못하면 아무런 광고 효과가 없고 오히려 고객들을 밀어내는 역효과를 불러오게 됩니다.

그럼 어떤 삶이 가장 성공적인 광고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악할지라도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악한 자라 할 지라도 그 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은 악한 의도를 갖고 있으면서도 선한 사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리까지도 악용하여 이득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 나름대로 선을 추구하려 하지만 세상의 삶이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타협하는 삶을 사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7:13-14)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사람들이 적을 것이라고 예견하셨습니다.

이런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사도 바울이란 신앙의 선배님이 계십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고전 4:9-13>

사도 바울은 이런 삶을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도 항상 옆에 있어 줄 아내가 그리웠을 것이고, 따뜻한 침대가 있는 자신만의 안식처를 갖고 싶었을 것이고, 자신의 상처 등을 이해해 주고, 자신의 단점들에 대해 변명할 때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기를 바랬을 것이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편하게 여행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채찍과 돌을 맞을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바랬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뿌린 씨앗이 자라나는 것에 대해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 이런 것들을 의도적으로 어느 한 순간 포기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다만 “바보”같이 예수님을 너무 사랑했을 뿐 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원하는 일을 하다 보니 어느덧 자신이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겨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과 같은 삶을 세상 사람들은 그 겉모습만 보고 외면하거나 잘못된 복음이라고도 해석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부요롭고, 존경받고, 건강하고, 편안한 생활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것과 같이 핍진한 삶은 광고 효과가 매우 탁월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일반인들이 추구하는 이런 모습이 이상하거나 무리스런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는 과도한 자기 사랑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이 세대가 추구하는 것은 자기의 이름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취하려 합니다. 심지어 간증도 이런 종류의 체험을 나누면 사람들은 은혜 받았다고 좋아합니다. 이런 이 세대의 성향은 예수님만 사랑했던 사도 바울의 삶과는 너무 다른 세상입니다.

그럼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을 “팔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냥 한도 끝도 없이 예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은 자신을 사랑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예수님을 선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고, 죄인 취급 받는 사람이 될 지라도 그냥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특별히 남에게 보여 주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자신의 의식주 문제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바로 예수님처럼 진리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으로 하여금 우리 삶을 통하여 빛을 발하게 해 드리는 삶이 바로 증인의 삶입니다. 예수님도 무조건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다가 변화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리고 이를 원하는 자들만이 자신을 따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사람들은 병든 자, 눈먼 자,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의에 도취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부담이 되었고, 세상의 좋은 것들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거침돌이 되었습니다.

증인의 삶은 남에게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삶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을 죽도록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증인이란 단어에는 순교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숨이 멎는 것을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순교는 인간의 가장 본능적 필요까지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찾는 자가 매우 적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물론 선배 되시는 사도 바울을 멀리서 바라보며 죄송할 따름입니다. 다시 한번 “Agapao”에서 ”Phileo” 로 내려 와 주시는 예수님의 자비를 바라볼 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