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전문 칼럼
개념 있는 그리스도인
        
 이헌미 (SNU KBS)      
 
 

전공과 신앙이라는 주제로 글을 부탁받았습니다만, 공부에 있어서나 믿음에 있어서나 한참 덜떨어진 제가 과연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 근대 정치담론 분석이라는 전공 자체가 워낙 마이너한 분야인 데다가, 제가 몸담고 있는 국제정치 및 정치학 분야에는 연구와 교육, 현실정치 참여에 있어 저와는 비교가 안 되게 풍부한 경험과 통찰력을 가진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시켜 선을 이루어주시기를 바라며 용기를 모아 부족한 글을 시작합니다.

학부 때 법학을 전공했던 제가 국제관계사와 정치사상사가 접목된 지금의 공부 길로 들어서게 된 데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습니다. 첫째, 법대 시절 싫으나 좋으나 읽어야 했던 법전 속의 한국어는 매우 생경하여 이해가 불가능했습니다. 나름 활자중독에 방대한 독서 편력을 자부하고 있던 저로서는 충격이자 도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바 이러한 법전의 난해함은 법률 개념 및 용어가 가지는 고유한 전문성에, 유럽의 근대법이 일본을 거쳐 이식, 수용되었다는 근대 한국 법제도의 역사적 특수성이 더해진 결과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한국의 “수입된 근대”가 낳은 정치언어의 불규칙한 단면이랄까 왜곡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계기는 고시공부 일변도의 법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휴학 후 날아간 런던에서 찾아왔습니다. 당시 저는 얼마 전 소천하신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님이 담임하시던 올 소울즈 처취(All Souls Church)에 다녔는데, 이 곳의 회중기도 내용이 참 흥미로웠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지와 진보지로 조선일보와 한겨레 신문을 꼽을 수 있는 것처럼, 영국도 데일리 텔레그라프(The Daily Telegraph)와 가디언(The Guardian)이 보수당과 노동당을 대변하는 양대 일간지입니다. 그런데 올 소울즈 처취의 대표기도에는 반드시 이 신문들의 가장 최근 국제적인 이슈들이 언급됩니다. 제가 있던 때에는 르완다에서 줄루 족과 후투 족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 상호간의 인종 청소와 난민 발생이 큰 문제였습니다. 당연히 이 지역을 위한 중보기도가 이루어졌고, 심지어 북한 문제를 놓고도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워낙에 삐딱한 사회과학도로서, 왕년에 제국을 경영했던 나라의 습관인가 싶기도 했지만, 세계를 품는 기도의 그릇에 내심 경악에 가까운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날 런던의 한 공원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노라니, “하늘은 저렇게 하나로 이어져 있는데 땅은 왜 이처럼 갈라져서 분쟁이 끊이지 않는가? 사람의 몸은 제각각 떨어져 있어서 물리적으로는 서로의 아픔을 느낄 수 없지만, 마음으로 그의 처지를 헤아려서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할까?”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습니다. “정치”에도 “국제”에도 통 관심이 없었던 제가 비록 미시적 차원이지만 국제정치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아마 그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정치 언어의 변화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개념사(槪念史)”라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한 제국 말기 ‘영웅’ 개념의 정치적 의미” 뭐 이런 논문을 씁니다. 그런데 “개념사(槪念史)”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의 개념에는 여러 층위의 의미가 축적되어 있으며, 한국인인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개념 A의 대표적 뜻 a를 백 년 전 A에 대입하는 현재주의의 오류나 태평양 건너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된 A’에 대입하는 보편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A는 반드시 그것이 사용된 구체적 문건-사료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교리의 대표적 개념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많은 신자들이 “교회”나 “성전”, “세례”, “성령”, 심지어 “하나님”이 실제 성경에서 어떻게 표현되며, 그 뜻이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지나면서 어떤 변화를 거치는지에 무관심하고 무지합니다. 그 대신 자기가 다니는 교회, 이스라엘 성지순례에서 목격한 건물, 오늘날의 세례의식, 남들의 경험,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에서 그 뜻을 추측합니다. 안타깝고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성경의 말씀은 텍스트 분석으로 끝나지 않고 성령의 조명과 초월적 계시가 더해짐으로써 의미가 완성된다는 점에서 제가 하는 세속적(?) “개념사(槪念史)”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근본 개념은 반드시 성경 내에서 천착하고 묵상되어야만 미혹되지 않고 진리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능력의 한계는 우리 기도의 범위를 넘지 못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꼭 전공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만, 대중 매체와 SNS의 발달로 모든 사람들이 모든 현상에 대해 한 마디씩 하는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특히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 국내를 막론하고 가타부타 네편내편 시비가 분분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손짓이나 휘파람이 아닌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헛된 말과 수군거림과 거짓말을 얼마나 미워하시는가 상기할 때,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나 사안에 대해 말하기 전에 기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엄격하고 강박적인 잣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기도보다 앞선 말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 의탁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 능력을 벗어나며 따라서 책임질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에도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말없는 탄식으로 중보하십니다만, 지금은 말의 능력과 책임에 대해 민감히 깨어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헌미 간사님은 서울대 성경공부(SNU KBS)를 섬기고 계시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박사과정 중에 계십니다.